JINGAB JEONG 정진갑
소녀 형상을 반복적으로 만드는 작가
작가 정진갑은 인체 형상 작업을 한다. 다섯 살배기 아이의 덩치만 한 작고 깡마른 소녀의 형상을 반복적으로 만든다. 굳이 소녀라고 한 것은 한눈에 초등학교 고학년쯤 됐음직한 몸매를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작품은 소녀인지 소년인지 구별이 분명하지 않다. 걸치고 있는 옷 역시 중성적이고 표정을 보더라도 아이인지 어른인지 모호하다. 그저 소녀적이다.
어린 여자아이는 가부장적 문화의 질서 혹은 억압으로부터 젠더가 분화되면서 ‘소녀-되기’가 진행된다. 작가의 소녀 형상들은 이 전이가 완성되지 않은 미성숙의 단계에서 멈춰 있다. 달리 말하면 ‘소녀’가 아니라 ‘인간의 어린 시절’이며 힘과 권력이 없는 ‘연약한 어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작가의 형상을 ‘소녀적’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소녀는 인간의 가장 연약하며 순수한 상태를 표상한다. 한 시인이 소녀를 두고 “아직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직전 소리를 머금고 있는 종”이라고 묘사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표현되지는 않았으되 몸 가득 잠재된 표현을 머금고 있는. 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니면서,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중간적 존재인 소녀는 미세하고 예민하고 애매하다. 그래서 ‘사이-존재’라고 할 수 있다. ‘사이-존재’에서는 사건이 일어나는 표면이기에 무엇이든 가능한 동시에, 재현할 수 없는 비가시적이기에 어떠한 것도 불가능하다.
‘소녀적인 몸’은 전의식preconciusness 단계의 기억들이 들끓고 있는 몸이다. 프로이트는 전의식을 의식과 무의식 중간에 놓으면서 언제라도 현재화될 준비가 된 채 잠복하고 있는 (무)의식이라고 했다. 기억의 대상은 심적 표상이기보다 몸을 통해 드러난다. 우리는 ‘마음의 투시성transparency’을 통해 몸과 마음, 기억을 상호의존적으로 관련 지운다. 몸은 그래서 마음과 정신과 기억의 삼투가 일어나는 구체적인 현장이라 할 수 있다.















몸, 기억과 트라우마의 현장
작품에서 몸은 군데군데 날카롭게 깨져 있다. 금이 가고 구멍이 난 이 파괴적 이미지는 그대로 몸의 고통이 진행되고 있는 환부 혹은 감춰진 트라우마trauma로 보인다. 형상이 만들어진 다음에 외부로부터 가해진 폭력의 흔적인 까닭이다. 인간 활동의 대상은 마음이나 의식이 아니라 몸이며, 몸은 단순히 생물학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으로 구성되어지는 사건들의 장이다. 그렇다면 소녀의 몸에 새겨진 상처는 전에 일어난 어떤 사건의 인덱스index일 것이다. 상처는 부재하는 기억을 대신하는 육체적 기억이다.
몸은 일반적 몸the body과 구체적인 몸embodiment을 구별하는데, 작가의 소녀 형상에서 문제되는 것은 구체적인 몸이다. 작가의 내면으로부터 형상화된 구체성이 미분화된 성性인 ‘소녀적인 것’으로 표상되어 있다. 이것은 경험적 차원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막 사회화되기 시작하는 소녀시기에 가족관계는 모든 사회적 갈등 양상이 모아지는 곳이고 출발되는 곳이다.
나의 작업은 폭력에 노출되어 트라우마를 가진 인체 형상을 시각화한 것이다. 이는 내 자신이 갖고 있는 폭력적 트라우마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에서 시작하여 인체 형상에 대한 시각적 모티브이자 시대를 넘어 현존하는 가정 내 폭력을 주제화하고 있다. _작가노트 중에서
작가노트에서 적고 있듯이 작가 정진갑이 반복적으로 작업하고 있는 상처 난 소녀 형상들은 가정 내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슬프도록 잔인한 현장의 서사이며 누설이다. 폭력의 속성은 중력의 법칙과도 같이 위(강자)에서 아래(약자)로 내려가며, 질량보존의 법칙처럼 무한 반복된다. 오히려 최근의 소셜 미디어 사회에서는 신종 바이러스처럼 무작위로 번식한다.
작가는 유년시절 반복적으로 겪은 불가해한 폭력의 현실에 강박적인 회의를 갖고 자란다. 절대강자인 아버지의 폭력과 그것을 견디거나 침묵해야 했을 어린 자신의 무기력함에서 오는 페시미스트적 분노. 이름 붙일 수 없는 괴물(트라우마)인 그것은 다시 약자인 어린 동생에게 향하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겨냥하기도 하며 반복되었을 터이다.
반복되는 자아의 드라마
스무 살이 되어서도 불가해한 장면을 만날 때마다 그 내면화된 괴물은 불쑥불쑥 튀어나오려 꿈틀거렸고, 그것을 풀어 낱낱이 산화해버리기 위한 작가의 투쟁이 시작된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며 느닷없이 미술을 선택했고, 미대생이 되었을 때 구체적인 폭력의 현장인 몸을 손으로 빚어냈다. 대학생 시절 만든 가시로 된 높은 의자 위에 앉은 소녀로 마침내 형상화되어 마음속에서 폭력이 산화반응을 일으켰다. 그것이 죽거나 내가 죽거나 하는 야곱의 씨름이 벌어졌다. 그 후 줄곧 타종이 됐으되 종소리를 내지 않고 머금은 소녀 형상 작업을 한다.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 끊임없이 서사를 짓는다. 작가 정진갑에게 있어 상처 난 소녀 형상의 서사는 폭력이란 통로로 사물의 본질에 가닿고 존재의 심연을 드러내 보이는 한 소통방식이다. 반 고흐의 <잘린 귀의 초상>을 논하면서 “예술은 치유되지 않는 상처에서 태동한다”면서 “인간 존재의 피비린내 나는 신화”를 가진 화가인 그의 작품들은 “강력한 희생적 오브제로 존재한다”고 했던 바타유Georges Bataille를 정진갑의 ‘가해진 폭력’ 혹은 ‘자해된 몸’ 형상들을 읽는 또 하나의 코드로 전유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는 지점이다.
한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예술가의 창조적 행위란 죽음충동death drive이 실체화되는 순간이라고 했다. 예술이란 트라우마의 방어이며 그것의 점진적인 치료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불편한 실재와의 조우에서 나타나는 실존적 불안을 가리는 동시에 드러냄으로써 그것의 있음을 반복적으로 지시한다.
실재는 (재현)불가능하기 때문에 오직 반복만이 가능하다. 숙명적으로 비가시성인 그것을 끝없이 가시화하려는 예술가의 반복적 작업결과인 ‘오브제 a’들, 바로 그 지점에 정진갑의 ‘사이-존재인 소녀 형상들’이 놓인다. 그 사이-존재는 작가 자신이 겪은 폭력과 대물림으로 출몰하는 트라우마를 한 몸에 머금은 채 그것을 한 번 한 번 산화시킴으로써 치유해나가고 사회적 폭력의 메커니즘에 말을 건다.
수동적 몸짓, 상처의 이중적 표상
작품 속 소녀의 몸짓은 적극적인 행동이라기보다는 행동이 멈추어진 상태, 관망적 상태라는 특징을 보인다. 여성적이며 나이 든 어른의 모습이기도 하다. 적극적 행위가 사라진 수동적 자세인데, 이것은 기억으로서의 행위 자체가 수동적 행위라는 표상을 띠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수동적 자세는 자연스럽게 시간적 가역행위를 획득함으로써 과거로의 회귀 혹은 회상의 통로가 된다.
그러나 행위의 차원에서 신체의 행위가 아니라 외부에서 가해진 폭력에 의한 수동적 행위이다. 상처는 폭력적인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다가올 자발적 현실화의 중단을 강제한다. 몸 스스로 신체적 자아의 강한 부정을 하는 것으로, 작가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현상인 것이다. 폭력의 대상인 몸이 바깥에 있고 관찰자 혹은 폭력의 주체인 타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 자아의 드라마이다. 행위의 주체와 대상, 과거와 현재(미래)가 ‘사이-존재’인 ‘소녀적인 몸’에 공존한다.
과거에 대한 트라우마는 반복적 학습을 통해 종래에는 과거 약자에서 강자에 대한 동일시를 이루게 되어 과거의 폭력자와 같은 폭력성을 유발하게 된다. 즉 인간의 방어적 성향과 공격적 성향은 항상 불가분의 관계이며, 시대를 불문하고 끊이지 않는 인간 본연의 폭력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런 폭력적 트라우마를 고찰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근본적인 문제를 나의 작품에서 보여주고자 한다. _작가노트 중에서
가령 <돼지의 왕>이란 애니메이션 영화가 떠오른다. 폭력의 대물림 메커니즘을 아주 잔인하게 보여준 이 영화는 폭력을 당하거나 묵인하는 부류를 ‘돼지’라고 부르는데, 거기서 한 ‘돼지’의 목소리를 연기했던 양익준이 연출한 영화 <똥파리> 또한 우리 가까이 혹은 우리 안에 있는 폭력성을 징그럽도록 리얼하게 보여준다.
만연된 폭력에 시비를 걸어 대중들의 이야깃거리로 끌어낸 양익준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폭력적 기억에서 벗어나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이런 작품이 나올 수밖에 없다”며 “작품을 통해 쏟아내는 것이고 그걸 털어내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것이다”라고 한 말은 그대로 정진갑의 작가노트와 겹친다.
작가 정진갑의 서사는 꼬리를 문 뱀의 형상처럼 가역적이다. 작가가 개인전의 제목으로 붙인 ‘방어적 비관주의자Defensive Pessimist’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작가가 작품을 통해 처절한 씨름을 시작한 것은 그 안에 긍정적 낙관주의가 공존함을 말해준다. 그가 상처 난 소녀 인체 형상을 반복적으로 만드는 것은 폭력의 대물림이라는 반복양상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죽음충동을 통한 트라우마의 치유과정으로서의 자아의 드라마를 형성한다. 작가는 이것을 ‘주체-대상’ 그리고 ‘과거-현재(미래)’의 가역적 현장인 ‘소녀적인 몸’으로 표상하고 있다.
Solo exhibition
2017 Jeong jin gab Solo exhibition_ CHOI JUNG AH Gallery(Seoul)
2011 Defensive Pessimism_ Insa Art Center(Seoul)
Group exhibition
2019 Separation Anxiety_ L Gallery(Seoul)
2017 “your graceful heart"_57th Gallery(Seoul)
Charity Bazaar_ Space K (Seoul)
2015 Share-Heart_ CHOI JUNG AH Gallery(Seoul)
raw regard_ CHOI JUNG AH Gallery(Seoul)
2014 Charity Bazaar_ Space K (Gwacheon)
FINDING ME_ NUMTHONG Gallery (Thailand)
BJN Gallery 2nd Contest Exhibition_ BJN Gallery (Seoul)
Art swordsmen at old teashops_ Gungdabang Gallery (Kwangju)
2013 Gwangju Shinsegae art festival_ Shinsegae Gallery (Kwangju)
2012 Charity Bazaar_ Space K (Seoul)
Critical Point_ Space K (Kwangju)
‘Dadak Dadak '_ Gallery Artery (Bangkok)
Asia young artist festival 'Luggage'_ Gallery Artery (Bangkok)
2011 ASYAAF_ Hongik UNIV (Seoul)
NEW FORM NEW CONCEPT_ Mokam Museum (Koyang)
Songdo Sculpture Festival_ Songdo Cannalwalk (Incheon)
2010 Koyang International Sculpture Symposium_ Ilsan Hosu Park (Koyang)
NAMSEOUL INTERNATIONAL GLASS WORKSHOP (Namseoul UNIV)
one_ Hongik Museum of Art (Seoul)
Ilbojik_ Iang Gallery (Seoul)
2009 Signe of Happiness_ KOSA space, (Seoul)
I am_ Hongik Museum of Art, (Seoul)
Ode to youth_ Geoje Arts Center, (Geojedo)